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명 6/사회 제도 (문단 편집) ==== [[동원령]](Mobilization)[anchor(동원령)] ==== ||<-2> [[파일:Mobilization_(Civ6).png|width=65]][br]'''{{{+2 {{{#ffffff 동원령}}}}}}''' || ||<-2>최초의 치프틴(스코틀랜드의 족장)이 신체 건강한 모든 부족원에게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한 이래로, 동원령은 정부의 특권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동원령'이 지속되기 시작한 시기는 프랑스 혁명을 막아내기 위해 정부에서 시민을 대량 징집한 이후부터였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시절에는 전보와 철도를 위시한 새로운 기술로 인해 국가가 좀 더 효율적인 군사 징집 및 동원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미연합국|남부 연방]]은 자유 신분을 가진 인구 중에서 대략 11%를 전쟁에 동원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프로이센]]은 75%의 예비군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었으며, 이는 제 2차 슐레스비히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급격한 산업화를 이룬 두 국가인 영국과 미국은 전 세계의 동원계획 분야를 주도했습니다. 영국은 제국 유지를 위해 다수의 영국군을 먼 지역으로 파병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으며, 미국은 나름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미국군을 먼 지역을 보낼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보어전쟁|보어인]]과 맞닥뜨린 영국은 빠르게 병사를 동원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었고, 쿠바의 독립 운동에 자극을 받은 미국 역시 카리브 해와 필리핀의 불운한 [[미서전쟁|스페인을 상대로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도 이에 주목했으며, 1914년 7월에 [[프란츠 페르디난트|아르치듀크 페르디난트]]의 [[사라예보 사건|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먼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동원령을 발령했고 이어서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뒤를 따랐습니다.|| ||<-2><:>{{{+2 {{{#ffffff '''설명'''}}}}}}|| || 인용구 ||'''"전쟁을 준비할 때, 동원단계가 끝나기 전까지는 무력 정치를 하는 자들이 평화에 대해 가장 말을 많이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정부는 사람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적이 필요하다. 만약 실제 적이 없다면, 우리를 동원하기 위해 적을 만들어낼 것이다.'''" - [[틱낫한|틱녓하인]] || || 선행 사회 제도 ||도시화, 초토화 작전 || || 후속 사회 제도 ||이데올로기 || || 영감 조건 ||군병력 중 3개의 군단을 보유하십시오. || || 영감 문구 ||군사력이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무력을 세계 무대에서 선보일 때입니다. || || 효과 ||[[문명 6/총독|총독]] 타이틀 +1 || || 잠금 해제 ||같은 유닛 셋, 또는 군단, 선단과 단일 유닛으로 군대 또는 함대 형성 가능 전쟁 명분 '''영토 확장 전쟁''' 군사 정책 카드 '''군민봉기''': 내 각 유닛의 유지비로 소모되는 금 -2 || 방위 조약을 맺은 동맹이 공격당하면 나머지 조약국들은 공격한 문명에 자동으로 선전 포고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